NO:322 | 제목:이방원 목욕하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머문 이곳... 109년의 역사 문 닫다 | 글쓴이:땡글이 | |||||||||||||||
유성온천의 대명사였던 유성호텔이 지난 달 31일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지 109년(개관 1915년) 만이다. 이 곳은 온천시설인 대온천탕으로 명성이 높아 아직도 유성온천하면 유성호텔 대온천장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유성온천은 1000년이 넘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략 간추리면 이렇다. 백제 때 신라군과의 전쟁으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한 병사가 있었다. 어느 날 집 앞을 지나 논길을 걷는데 다친 학 한 마리가 내려앉아 여러 날을 오가며 상처 난 날개에 물을 묻히기를 반복했다. 가까이 가보니 뜨거운 물이 나왔다. 이를 본 병사의 어머니가 물을 떠다 아들의 상처를 씻겼고 오래지 않아 상처가 아물었다. 이후 병을 앓는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치료를 위해 목욕했다. 유성온천과 관련한 전설인데, 충남 온양온천과 덕산온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실제 우리나라 온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때부터 나와 있다. 통일신라 신문왕이 부산 동래온천에서 목욕하고, 고려시대 문종과 충렬왕, 우왕 등 왕과 왕족들이 온천을 즐긴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왕과 왕족, 대신들이 치료 목적으로 온천을 방문한 기록이 많다. 이방원이 목욕한 곳
문헌상 등장하는 유성온천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7세기)이다.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이성계가 나라의 도읍을 계룡산 신도안에 정하기로 하고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 유성온천을 왕자들과 방문했다. 이때 이방원은 목욕하고 군사 조련 현장을 관람했다. 유성온천이 본격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조선대전발전지'(일제강점기 대전지역 일본인 상공인 조직인 대전실업협회가 발행한 대전 시지형태의 책, 1917년 12월 발행)에는 "1910년 스즈키 쇼키치가 유성온천을 세상에 알렸다. 유성온천의 창설자이며 개척자다. 그의 노력으로 주식회사 대전온천을 설립(1913년)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회사의 중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처음 온천을 개발한 곳이 유성호텔 구관 자리다. 유성호텔 개관은 1915년이다. 또 이 책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 중사시험소 기사 이마즈 아키라 씨가 조사한 결과 조선 소재 온천 중 라듐 함유량이 동래, 해운대, 온양,용강 등에 비해 가장 많은 양이 함유돼 있다고 발표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유성온천은 조선 제일의 약천으로 유명해져 외부 자본이 유입되면서 관광, 휴양 등 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선대전발전지에는 "이 회사(주, 대전온천)는 (유성호텔에) 대온천욕장 4개와 특등 욕장 2동을 설치하고 2개의 여관 설비를 갖춰 입욕객들의 불편이 없다. 기타 조선인 취향의 여관 3개가 더 있다. 유성은 보양지로, 유람지로 이상적인 장소"라고 소개하고 있다. "온천의 풍취를 곁들이기 위해 벚꽃과 단풍나무를 심고 연못을 설치, 오락장 설치 계획"도 전했다.
당시 주식회사 대전온천의 대주주는 공주 갑부 김갑순이었다. 그는 대한제국기에 부여군수·공주군수·아산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중추원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을 올렸다. 김갑순은 1912년 유성온천지 땅을 사들였고, 자본금 1만5000원으로 대주주가 돼 처음부터 전무이사를 맡았다. 1924년에는 '주식회사 대전온천'에서 '주식회사 유성온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락장을 신축했다. 주식회사 유성온천은 1940년대 자본금 20만 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김갑순은 전체 주식의 절반 이상을 보유한 실질적인 소유주이자 경영자였다. 김갑순과 유성호텔은 '금강대도(金剛大道)'와도 관련돼 있다. 조선총독부는 유성 인근 연기군 금남면(현 세종시)에 본산이 있던 '금강대도'의 토지와 건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였던 김갑순은 금강대도의 성전이 헐리자 이를 경매로 매입해 유성호텔을 개축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금강대도'는 유교, 불교, 선교를 하나로 이념화해 만든 종교로 당시 계급타파, 남녀평등, 단군과 홍익인간을 내세우며 활동했다. 조선총독부는 금강대도를 배일단체로 지목하고 민족종교 말살 정책으로 탄압하다 1941년 성전을 허물었다. 이때 10여 명의 신도가 고문과 폭행으로 숨졌다. 유성호텔 내 금강대도 건물의 흔적은 해방 후까지 유지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불타 사라지고 유성호텔 뒤 뜰 누각으로 남아 있다 이마저 개발 과정에서 철거됐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후 최고의 전성기
1960년 4.19 혁명 때 지역언론(중도일보) 기사를 보면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알려진 정치인으로 국회의장 등 역임)이 유성호텔에 피신해 머물고 있다는 있다는 소문이 돌아 시위대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호텔을 수색했다. 유성호텔은 196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후에도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1970년 대에는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이 머물기도 했다. 유성온천은 이후에도 개발이 지속됐다. 기록을 보면 1981년까지 유성온천지구에는31개 온천공이 개발됐다. 그러다 1981년부터는 온천법이 제정돼 허가 없이 온천공 굴착을 하지 못하게 했다. 유성온천은 1994년 8월에는 관광특구로 지정돼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전국에서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렸다. 그 중 유성호텔은 주말이면 가족과 나들이 겸 온천을 즐기는 대표적 장소였다. 하지만 점차 관광객이 줄었고 2019년 유성온천지구 관광객은 93만 3000여 명이었다. 관광객이 감소하자 유성호텔 인근 리베라호텔과 아드리아호텔이 각각 지난 201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유성구는 유성온천의 명성을 살린다며 지난 2020년부터 유성온천지구인 봉명동 일원에 국제온천지구를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런 와중에 유성온천의 역사·문화적 상징이었던 유성호텔마저 문을 닫았다. 문 닫은 유성호텔은 이제 지역 상권 침체의 상징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지금의 호텔 자리에는 오는 2028년까지 24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과 호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유성온천지구에는 유성호텔과 유성구청을 포함 12개 업소에서 21개 온천공을 소유하고 있다. 가장 많은 온천공을 보유한 곳이 문을 닫은 유성호텔(4개)이다. 대부분 온천공이 유성호텔 부근에 밀집돼 있다. 이 중에는 유성구청에서 개발한 공공관정도 있는데 유성구는 공공 관정을 통해 약 1.4km 거리까지 온천수 공급 관로를 깔아 50여 곳 업소에 업소에 온천수를 공급하고 있다. |